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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우의 진실


   
 
  ▲ 박찬수 시인  
 
김옥균은 상해에서 동족인 홍종우에게 암살됐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김옥균은 영웅이고,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는 파렴치한 암살자인가?

홍종우가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자 파리의 박물관 사서로서 프랑스에서 ‘춘향전’, ‘심청전’ 등을 번역하여 출판한 지식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홍종우가 활약하던 대한제국 당시가 거의 확실히 신분차별이 철폐되었을 때다.

홍종우는 별 볼일 없는 가문에 찢어지게 가난한 출신이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홍종우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안은 기울대로 기울어 가난하기 짝이 없었으며, 아버지는 여러 고을을 전전하다 전라도의 고금도까지 흘러 들어갔다.

홍종우는 유럽에서도 선진국인 프랑스 파리에 유학하고자 프랑스에 가기 전부터 1880년대에 편찬된 ‘한불사전’을 가지고 불어 공부를 했다. 집이 가난했던 홍종우는 파리로 가기 위하여 일본에 머물러 2년 정도 일하면서 뱃삯을 모았고, 38세의 늦은 나이로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홍종우는 박물관에서 일하며 조선에서 들여온 문물을 분류하는 작업을 했으며, 프랑스의 선진 문물을 공부하고 조선의 문화를 전파하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는 개화사상을 지닌 신지식인 청년이었으나, 보수적인 면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그는 파리에서 양복을 입지 않고 한복을 입고 다녔으며, 조선의 개방과 개화를 소신으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통이나 군주의 권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갑신정변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이란 위험한 인물이 일본에 있는 동안 고종은 밤에 잠을 편히 잘 수가 없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여러 번 자객을 보내 김옥균을 죽이려 했으나, 김옥균 주변에 언제나 사람이 있어 성공하지 못했다.

마침 그때 3년간 파리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던 홍종우가 우연히 자객과 선이 닿아 이 일을 맡게 되었다. 홍종우가 볼 때 김옥균은 자신과 같은 개화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과는 가는 길이 전혀 달랐다.

김옥균은 체제를 뒤집은 뒤 국민국가를 만들 생각이었고, 홍종우는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전통을 지킨 채 근대화하여 제국의 침략을 저지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위험한 사고를 가진 김옥균을 제거하는 일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옥균에게 접근한 홍종우는 1894년 3월 김옥균을 설득하여 상해로 함께 떠난다. 이미 일본에서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게 된 김옥균은 홍종우의 말대로 청국의 이홍장과 교섭해서 무엇이라도 얼어낼까 하여 상해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프랑스 유학생이자 지식인이었던 홍종우가 김옥균에게 접근하는 일은 쉬운 일이었다. 둘 다 개화사상을 가진 지식인으로 쉽게 의기투합한 데다가, 홍종우의 프랑스 요리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다. 거기에 매료된 김옥균은 홍종우를 더욱 신뢰했다.

상해의 동화여관에 도착하여 여장을 푼 뒤 김옥균이 잠에 떨어졌을 때 김옥균에게 3발의 총탄을 쏘았고 김옥균은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김옥균은 죽은 다음에야 일본에서 영웅으로 추모되었다.

김옥균이 일본 신문물을 배우고 일본을 업고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앞으로 조선을 병탄할 때 김옥균이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러니 김옥균의 일생을 윤색하여 소설과 희곡 등을 만드느라 돈을 질렀고, 신문마다 애도사를 싣느라 지면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실제로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한 후 김옥균은 계속 떴고, 반대로 홍종우는 역적이 되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후 한일합방에 앞장섰던 친일파들은 더욱더 김옥균을 왜곡했다. 이들은 김옥균의 행적을 과장하거나 자기합리화의 단초를 마련했다.

그들은 김옥균을 동아시아의 선각자, 뜻을 이루지 못한 선각자, 아시아 연대론의 선구자 등으로 추대하였다. 김옥균이 추앙을 받을수록 홍종우는 근대 개화의 선각자를 죽인 파렴치한 암살자의 이미지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김옥균에 대한 평가도 엇갈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혁명가로 추앙받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매도되고 있다.

홍종우는 대한제국 설립 이후 사상적 기반이나 현실적 처지로 인해 봉건적 사회 구조에 거부감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신흥세력이었다. 근대화 지상주의에 몰입하여 외래 사조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개화파나, 기득권과 체제유지에 급급했던 보수 관료들과는 구분되는 분명 제3의 세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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